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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류시화
    끄적거리기 2017. 5. 25. 01:44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 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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