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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빠 판타지 (한겨레신문중에서)
    남과여 2011. 1. 14. 13:33

    나이가 적든 많든 남자들은 ‘오빠’라고 불리기를 욕망하고 그 불림 앞에 속칭 ‘뿅’가며 녹아버린다.

    오빠는 입을 동그랗게 모아서 ‘오’라고 했다가 ‘빠’라고 해야 본음에 충실한 발음이 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강부자의 ‘업빠’가 아닌 비음 여왕 전도연의 ‘오빠’라야 진짜 오빠다.

    고종석은 그의 책 <언문세설>에서 ‘o’ 소리를 말랑말랑하고 밝으며, ㅂ은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이렇듯 음운론적으로도 오빠는 태생적 매력 9단이다.

    당대 문화풍속의 거울, 유행가에도 오빠는 빠지지 않는다. ‘김영춘’의 홍도는 순정의 등불이요,

    오빠는 이 등불을 지켜주며 홍도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강력한 버팀목이다(<홍도야 울지 마라>).

    ‘현인’ 오빠는 흥남부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금순이가 안타까워 피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굳세어라 금순아>). 오빠는 요즘 노래 속으로도 돌아왔다. 떠난 사랑이 실망할까 화장을 고치던 ‘왁스

    ’는 오빠, 나만 바라봐라고 적극성을 보인다(<오빠>). 이에 질세라 자두는 그 특유의 김밥 마는

    음성으로 ‘오빠 파이팅’을 외치고, 오빠의 식사를 챙긴다(<식사부터 하세요>).

    가장 최근 ‘소녀시대’의 소녀들은 내 맘을 모르는 오빠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뭇 오빠들을 자책에

    빠지게 했다(<오빠 나빠>).

    이 모든 노래들 속에서 오빠는 능동이요, 넓은 품이고, 그러나 매력적으로 무심하기도 하다.

    거꾸로 오빠를 부르는 여자는 수동이요, 연약하고, 구애자의 역할을 한다. ‘7080’ 대학가에서 오빠가

    멸종되고 ‘형’이라는 중성적 호칭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덕분에 ‘오빠 믿지’라는

    대사에 하룻밤 순정을 바치는 시대는 조기 종영됐는지 모른다.

    그러나 형마저도 사라져버린 탈이데올로기, 실존 상실의 시대에 오빠라는 단어는 사경을 헤매는 남

    성 개인의 존재감을 벌떡 일으켜주는 묘약일 수도 있다. 달리기를 멈춰버린 수말들의 마력(馬力)을

    다시 달리게 하는 마력(魔力)일 수도 있다.

    남자들은 오빠라는 말을 들으면 타인에게 향하는 원초적 방어기제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밥집에서

    더치페이를 당연히 예상했던 김 대리는 장난스럽게 던진 신입 여직원의 오빠라는 말에 파블로프의

    멍멍이처럼 지갑을 연다. 지각대장 애인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간 철수씨도, 오빠라는 말을

    들으면 그 여인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예수님이 된다. 뭐 하나 제대로 잘하는 것이 없고 늘 남보다

    뒤처지는 느낌에 콤플렉스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 찌질이에게 오빠라니, 내 역사적 사명을 띠고

    홍도 너를 지켜주리라, 라며 오빠는 갑자기 마음이 거인처럼 쑥쑥 커져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내

    영웅이야’라는 말에 남자들은 전 우주를 얻은 듯 포효하듯, 오빠라는 말에 남자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면서 그렇게 살판이 나는 것이다.

    오빠라는 단어는 분명 의존의 냄새가 강하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존성의 양 갈래적 관점

    이라면 오빠라 부르는 여자는 직접적 의존을 통해, 오빠라 불리는 남자는 타인을 보호하고 돌봐주

    려는 간접적 의존을 통해 서로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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